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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 로치의 카메라가 응시한 인간의 존엄
1편. <나, 다니엘 블레이크>
도움받기 위해 시스템을 찾아갔지만, 시스템은 사람을 거부했다.
2편. <미안해요, 리키>
프랜차이즈는 자영업이라더니, 왜 나는 오히려 종속되어 있나?
3편. <더 올드 오크>
적은 이민자가 아니라, 분열을 부추기는 시스템이다.
::: 스테판 브리제의 분도 대신 품위로 말하기
4편. <아버지의 초상>(The Measure of a Man, 2015)
한 중년 남성이 마주한 실업과 감시, 그리고 침묵의 품위에 대하여
전체 리뷰 펼치기 / 접기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1편.
1편 :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나는 번호가 아니다”
한 남자가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만지작거린다. 그의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 영국 북부의 목수다. 평생 정직하게 손으로 일해온 그는 어느 날 심장 발작을 겪고 노동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충분히 아프지 않다’는 이유로 복지 수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일자리를 찾는 척을 하며 ‘요건을 충족하는 서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 시스템은 그 도움을 받기 위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정상이어야 하는지’를 강요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 한 남자의 투쟁을 따라가는 이야기지만, 그를 통해 현대 복지 시스템의 비인간성이 어떻게 삶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무너뜨리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감독 켄 로치는 인물의 눈물이나 분노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시선으로 일상을 보여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불편함과 동정심 사이에서 서성거리게 만든다.
다니엘의 적은 누구였을까? 복지센터의 직원? 그의 이름을 대체한 숫자 코드? 클릭 하나로 신청서를 반려하는 디지털 시스템? 어쩌면 진짜 적은, 그런 괴물이 만들어지도록 방관하거나 순응한 사회 전체였을지 모른다.
이 영화가 특히 강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풍경을 가감없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든 노동자에게는 디지털 문명이 ‘새로운 문맹’이 되고, 젊은 세대에게는 서류 한 장조차 복잡한 관료의 언어로 가로막힌다. 더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시스템. 정치는 정치를 하고, 행정은 행정을 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버텨야 하는 시대. 그 사이에서 “나는 사람이다. 나를 존중하라”고 외치는 다니엘의 말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하나의 절규다.
이야기는 거창한 혁명을 말하지 않는다. 다니엘이 도움을 주려 했던 싱글맘 케이티도, 벼랑 끝에 몰린 채 제 아이들을 위해 굶는다. 모두가 조금씩 무너져가는 세계다. 켄 로치는 이 붕괴의 장면들 속에서 “연대”라는 작고 희미한 가능성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특별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길거리에서 나눠준 한 끼의 음식, 복지센터 안에서의 작은 위로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종종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나약함으로 돌리며 위로한다. “좀 더 준비했더라면”, “그때 신청만 잘했더라면” 같은 말들로. 하지만 켄 로치는 그 반대편에서 묻는다.
과연 인간은 시스템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아니면 시스템이 인간을 위해 설계되어야 하는가.
1편 :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나는 번호가 아니다”
한 남자가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만지작거린다. 그의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 영국 북부의 목수다. 평생 정직하게 손으로 일해온 그는 어느 날 심장 발작을 겪고 노동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충분히 아프지 않다’는 이유로 복지 수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일자리를 찾는 척을 하며 ‘요건을 충족하는 서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 시스템은 그 도움을 받기 위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정상이어야 하는지’를 강요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 한 남자의 투쟁을 따라가는 이야기지만, 그를 통해 현대 복지 시스템의 비인간성이 어떻게 삶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무너뜨리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감독 켄 로치는 인물의 눈물이나 분노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시선으로 일상을 보여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불편함과 동정심 사이에서 서성거리게 만든다.
다니엘의 적은 누구였을까? 복지센터의 직원? 그의 이름을 대체한 숫자 코드? 클릭 하나로 신청서를 반려하는 디지털 시스템? 어쩌면 진짜 적은, 그런 괴물이 만들어지도록 방관하거나 순응한 사회 전체였을지 모른다.
이 영화가 특히 강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풍경을 가감없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든 노동자에게는 디지털 문명이 ‘새로운 문맹’이 되고, 젊은 세대에게는 서류 한 장조차 복잡한 관료의 언어로 가로막힌다. 더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시스템. 정치는 정치를 하고, 행정은 행정을 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버텨야 하는 시대. 그 사이에서 “나는 사람이다. 나를 존중하라”고 외치는 다니엘의 말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하나의 절규다.
이야기는 거창한 혁명을 말하지 않는다. 다니엘이 도움을 주려 했던 싱글맘 케이티도, 벼랑 끝에 몰린 채 제 아이들을 위해 굶는다. 모두가 조금씩 무너져가는 세계다. 켄 로치는 이 붕괴의 장면들 속에서 “연대”라는 작고 희미한 가능성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특별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길거리에서 나눠준 한 끼의 음식, 복지센터 안에서의 작은 위로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종종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나약함으로 돌리며 위로한다. “좀 더 준비했더라면”, “그때 신청만 잘했더라면” 같은 말들로. 하지만 켄 로치는 그 반대편에서 묻는다.
과연 인간은 시스템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아니면 시스템이 인간을 위해 설계되어야 하는가.
전체 리뷰 펼치기 / 접기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 (2019)>
2편.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 (2019)>
“배달이라는 이름의 감옥” –‘유연노동’의 착취 구조
리키는 자영업자가 아니다.
그는 배달 회사의 직원도 아니다.
그는 계약서상 ‘독립된 파트너’다.
그 말은 곧 회사는 그의 노동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는 1편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후속작처럼 보이지만, 실은 또 다른 전선(戰線)이다. 전편에서 복지 시스템이 사람을 얼마나 비인간화시키는지를 다뤘다면, 이번엔 그 ‘시스템 바깥’에서 살아남으려는 이들이 겪는 노동의 야만화가 주제다. 복지 시스템에서 탈락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곧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노동’뿐이다. 문제는, 그 노동이 더 이상 노동의 이름을 붙일 수 없을 만큼 파편화되고 착취적인 구조 안에 있다는 점이다.
리키는 가정이 무너지는 속도를 자신의 속도계로 매일 확인한다. 그는 하루 장시간 배달 차량을 운전한다.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간다. 회사는 그에게 차량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이를 감당하기 위해 집에 있던 가족의 자동차를 팔고 새 밴을 구입한다. 대출과 리스, 보험과 기름값이 그의 땀보다 먼저 그의 돈을 삼킨다.
영국에서는 이런 ‘자영업자형 계약직’을 긱 워커(gig worker)라 부른다.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배달 기사, 앱 기반 운전기사 등으로 이름은 다양하지만, 본질은 같다. 책임은 개인에게 있고, 이윤은 시스템에 집중된다.
리키의 부인 애비는 요양보호사다. 그녀 역시 계약직이다. 노인들의 집을 방문해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일을 한다. 리키가 없는 동안 아이들은 학교에서 일탈하고, 딸은 소외되고, 아들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한다. 집은 더 이상 쉼터가 아니라 긴장과 상처의 공간이 된다. 가족 전체가 일터로 끌려가 있는 셈이다.
이 영화가 지닌 힘은 눈물에 있지 않다. 영화 내내 폭발적인 장면은 거의 없다. 대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삶이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 극적인 비극이 아니라, 서서히 녹아내리는 현실. 그렇게 한 가족이 해체되어간다.
켄 로치는 여기서도 연대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연대는 이전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 모두가 각자의 리스크를 짊어진 채, 내일은 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하루를 버티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플랫폼 안에 흡수되고, 관계는 점점 API 호출로 대체된다.
《미안해요, 리키》는 묻는다.
노동이 개인의 책임으로만 축소된 사회는 과연 건강한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노동이 오히려 더 무자비할 수 있지 않은가?
리키는 자유롭지 않다. 그는 사장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니다. 그는 책임만 있는 인간이다.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가 제안하는 새로운 계약의 또 다른 이면이다. 기업은 위험을 공유하지 않고, 국가는 그 위험을 구제하지 않으며, 개인은 그 위험 속에서 가정을 지켜야 한다.
“배달이라는 이름의 감옥” –‘유연노동’의 착취 구조
리키는 자영업자가 아니다.
그는 배달 회사의 직원도 아니다.
그는 계약서상 ‘독립된 파트너’다.
그 말은 곧 회사는 그의 노동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는 1편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후속작처럼 보이지만, 실은 또 다른 전선(戰線)이다. 전편에서 복지 시스템이 사람을 얼마나 비인간화시키는지를 다뤘다면, 이번엔 그 ‘시스템 바깥’에서 살아남으려는 이들이 겪는 노동의 야만화가 주제다. 복지 시스템에서 탈락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곧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노동’뿐이다. 문제는, 그 노동이 더 이상 노동의 이름을 붙일 수 없을 만큼 파편화되고 착취적인 구조 안에 있다는 점이다.
리키는 가정이 무너지는 속도를 자신의 속도계로 매일 확인한다. 그는 하루 장시간 배달 차량을 운전한다.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간다. 회사는 그에게 차량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이를 감당하기 위해 집에 있던 가족의 자동차를 팔고 새 밴을 구입한다. 대출과 리스, 보험과 기름값이 그의 땀보다 먼저 그의 돈을 삼킨다.
영국에서는 이런 ‘자영업자형 계약직’을 긱 워커(gig worker)라 부른다.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배달 기사, 앱 기반 운전기사 등으로 이름은 다양하지만, 본질은 같다. 책임은 개인에게 있고, 이윤은 시스템에 집중된다.
리키의 부인 애비는 요양보호사다. 그녀 역시 계약직이다. 노인들의 집을 방문해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일을 한다. 리키가 없는 동안 아이들은 학교에서 일탈하고, 딸은 소외되고, 아들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한다. 집은 더 이상 쉼터가 아니라 긴장과 상처의 공간이 된다. 가족 전체가 일터로 끌려가 있는 셈이다.
이 영화가 지닌 힘은 눈물에 있지 않다. 영화 내내 폭발적인 장면은 거의 없다. 대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삶이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 극적인 비극이 아니라, 서서히 녹아내리는 현실. 그렇게 한 가족이 해체되어간다.
켄 로치는 여기서도 연대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연대는 이전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 모두가 각자의 리스크를 짊어진 채, 내일은 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하루를 버티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플랫폼 안에 흡수되고, 관계는 점점 API 호출로 대체된다.
《미안해요, 리키》는 묻는다.
노동이 개인의 책임으로만 축소된 사회는 과연 건강한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노동이 오히려 더 무자비할 수 있지 않은가?
리키는 자유롭지 않다. 그는 사장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니다. 그는 책임만 있는 인간이다.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가 제안하는 새로운 계약의 또 다른 이면이다. 기업은 위험을 공유하지 않고, 국가는 그 위험을 구제하지 않으며, 개인은 그 위험 속에서 가정을 지켜야 한다.
전체 리뷰 펼치기 / 접기 <나의 올드 오크(The Old Oak : 2023)>
<나의 올드 오크(The Old Oak : 2023)>
“희망은 어느 테이블에 앉아 있는가?”
‘더 올드 오크(The Old Oak)’는 영국 북부의 어느 쇠락한 마을에 있는 마지막 술집의 이름이다.
쇠락한 마을, 낡은 술집, 떠나간 사람들.
그리고 어느 날, 시리아 난민들이 그 마을에 들어온다.
켄 로치의 영화는 늘 주변부를 응시한다.
이번엔 그 주변부 안에서도 가장 외진 곳 — 더 이상 무너질 것도 남지 않은 사람들의 공간이다.
《더 올드 오크》는 피로와 분노로 침잠해버린 영국의 백인 노동계급과, 말도 문화도 통하지 않는 난민들이 한자리에 놓였을 때 벌어지는 감정의 충돌을 다룬다.
주인공 TJ는 술집 ‘더 올드 오크’의 주인이다.
이 술집은 단지 맥주를 파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정치 얘기도 하고, 가족사도 털어놓고, 축구도 욕하고, 서로 욕도 하고, 어깨를 부딪치는 공간이다.
즉, 공동체의 마지막 거점이다.
그런데 이 공간에 이방인이 들어온다.
반갑지 않다.
아니, 환멸스럽기까지 하다.
가진 것도 없는데, 더 나눠야 한다니.
누구는 정부의 지원도 없이 살고 있는데, 누구는 새 집과 생필품을 배급받는다.
켄 로치는 여기서 “빈자들끼리의 갈등”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꺼내든다.
이 영화에는 악당이 없다.
모두 피해자다.
시리아 소녀 유나는 상냥하고 똑똑하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만으로 마을 사람들은 자극된다.
그들의 반응은 무지하고 공격적이지만, 그 또한 생존의 방어기제다.
그들은 잊혀졌다.
산업화의 열매에서 배제됐고, 세계화의 속도에서 밀려났다.
이젠 정부도, 정당도, 언론도 그들을 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타자’가 온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갈등만 보여주지 않는다.
희망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유나와 TJ는 오래된 술집 안의 낡은 테이블을 다시 펴고, 거기에 음식을 차린다.
시리아식 요리와 영국식 요리, 아이들과 노인들, 슬픔과 웃음이 한 접시에 놓인다.
그 장면은 조용하지만 강하다.
공동체란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는 듯이.
《더 올드 오크》는 질문한다.
희망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그것은 정치적 언어나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낡은 테이블과 따뜻한 음식,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눈 맞춤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켄 로치는 이 영화에서 분노보다 조심스러운 온기를 택했다.
이야기는 격렬하지 않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이 영화는 가장 정치적인 영화가 되었다.
왜냐하면 여기엔 좌우의 이념도, 정파의 선동도 없이 공존이 가능한가에 대한 현실적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연대를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연대가 사라진 시대에 그것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는 드물다.
켄 로치는 이 세 편의 영화로 오늘의 유럽, 그리고 나아가 전 세계가 맞이하고 있는 ‘공동체의 소멸’과 ‘인간성의 복원’ 사이의 긴장을 그렸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복지의 붕괴,
《미안해요, 리키》는 노동의 착취
“희망은 어느 테이블에 앉아 있는가?”
‘더 올드 오크(The Old Oak)’는 영국 북부의 어느 쇠락한 마을에 있는 마지막 술집의 이름이다.
쇠락한 마을, 낡은 술집, 떠나간 사람들.
그리고 어느 날, 시리아 난민들이 그 마을에 들어온다.
켄 로치의 영화는 늘 주변부를 응시한다.
이번엔 그 주변부 안에서도 가장 외진 곳 — 더 이상 무너질 것도 남지 않은 사람들의 공간이다.
《더 올드 오크》는 피로와 분노로 침잠해버린 영국의 백인 노동계급과, 말도 문화도 통하지 않는 난민들이 한자리에 놓였을 때 벌어지는 감정의 충돌을 다룬다.
주인공 TJ는 술집 ‘더 올드 오크’의 주인이다.
이 술집은 단지 맥주를 파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정치 얘기도 하고, 가족사도 털어놓고, 축구도 욕하고, 서로 욕도 하고, 어깨를 부딪치는 공간이다.
즉, 공동체의 마지막 거점이다.
그런데 이 공간에 이방인이 들어온다.
반갑지 않다.
아니, 환멸스럽기까지 하다.
가진 것도 없는데, 더 나눠야 한다니.
누구는 정부의 지원도 없이 살고 있는데, 누구는 새 집과 생필품을 배급받는다.
켄 로치는 여기서 “빈자들끼리의 갈등”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꺼내든다.
이 영화에는 악당이 없다.
모두 피해자다.
시리아 소녀 유나는 상냥하고 똑똑하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만으로 마을 사람들은 자극된다.
그들의 반응은 무지하고 공격적이지만, 그 또한 생존의 방어기제다.
그들은 잊혀졌다.
산업화의 열매에서 배제됐고, 세계화의 속도에서 밀려났다.
이젠 정부도, 정당도, 언론도 그들을 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타자’가 온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갈등만 보여주지 않는다.
희망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유나와 TJ는 오래된 술집 안의 낡은 테이블을 다시 펴고, 거기에 음식을 차린다.
시리아식 요리와 영국식 요리, 아이들과 노인들, 슬픔과 웃음이 한 접시에 놓인다.
그 장면은 조용하지만 강하다.
공동체란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는 듯이.
《더 올드 오크》는 질문한다.
희망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그것은 정치적 언어나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낡은 테이블과 따뜻한 음식,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눈 맞춤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켄 로치는 이 영화에서 분노보다 조심스러운 온기를 택했다.
이야기는 격렬하지 않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이 영화는 가장 정치적인 영화가 되었다.
왜냐하면 여기엔 좌우의 이념도, 정파의 선동도 없이 공존이 가능한가에 대한 현실적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연대를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연대가 사라진 시대에 그것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는 드물다.
켄 로치는 이 세 편의 영화로 오늘의 유럽, 그리고 나아가 전 세계가 맞이하고 있는 ‘공동체의 소멸’과 ‘인간성의 복원’ 사이의 긴장을 그렸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복지의 붕괴,
《미안해요, 리키》는 노동의 착취
전체 리뷰 펼치기 / 접기 <아버지의 초상(La Loi du marché : 2015)>
<아버지의 초상(La Loi du marché : 2015)>
4편. 아버지의 초상(La Loi du marché : 2015)
영어 제목: The Measure of a Man
프랑스 원제: La Loi du marché (시장법)
국내 개봉 제목: 아버지의 초상
감독 : 스테판 브리제(Stephane Brize)
1. 복지국가의 실체적 균열
우리는 흔히 유럽, 특히 프랑스를 ‘복지국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복지가 곧 ‘공정함’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아버지의 초상》은 프랑스의 실업자 수당과 직업 재취업 과정이 어떻게 인간을 규정하고, 추락시키는지를 조용히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 티에리는 51세의 중년 남성이다. 오랫동안 중장비 기사로 일해왔지만, 어느 날 해고된다.
그는 실업 수당을 받으며, 국가가 요구하는 ‘재취업 프로그램’에 순응한다.
하지만 그 시스템은 이상하리만큼 비효율적이며, 사람을 자기 책임의 실패자로 몰아간다.
“기계가 고장났다고 사람이 고장난 건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고장난 기계는 버려지고, 티에리는 그 기계 취급을 당하고 있다.
2. 노동을 대체한 감시: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그는 대형 마트에 보안요원으로 취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노동은 노동이 아니다. 감시다.
그는 하루 종일 CCTV 화면을 들여다보며 누군가의 도둑질을 찾아내야 한다.
여기서 영화는 조용히 묻는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노동이 인간을 위엄 있게 만든다면, 감시는 어떤가.”
그리고 더 잔인한 질문이 이어진다.
“너는 동료를 팔아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 장면에서 티에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그는 화면 속에서 동료의 잘못을 보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 선택은 그를 해고로 이끈다.
그러나 관객은 안다. 그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마지막 자존이었다는 걸.
3. ‘가족 영화’라는 오해: 《아버지의 초상》은 윤리의 영화다
이 영화를 ‘가족 영화’로 볼 수도 있다.
물론, 티에리는 가족을 위해 산다.
장애를 가진 아들을 정성껏 돌보고, 아내와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한다.
하지만 영화의 핵심은 가족을 위해 어디까지 침묵하고, 어디서부터는 침묵을 거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딜레마다.
결국 그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지만, 가족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한다.
가난은 숨길 수 있어도, 양심은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4. 켄 로치와의 차이점: 분노 대신 품위로 말하기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국가를 향해 분노의 손가락질을 한다면,
《아버지의 초상》은 더 내면적으로, 더 조용하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라면 이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살겠는가?”
“그 침묵은 비겁함인가, 혹은 마지막 남은 인간다움인가?”
켄 로치가 외치고, 스테판브리제는 응시한다.
하지만 두 영화는 모두, 같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
이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갈수록 ‘선택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5. 윤리는 배고픔보다 약할까?
《아버지의 초상》은 묻는다.
“양심은 배고픔보다 강한가?”
“가난한 사람에게도 윤리를 요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영화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티에리라는 한 남자의 침묵 속에서
그 질문을 조용히 우리에게 넘긴다.
우리는 그 침묵을 보며 각자의 마음속에서 대답하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전부일지도 모른다.
4편. 아버지의 초상(La Loi du marché : 2015)
영어 제목: The Measure of a Man
프랑스 원제: La Loi du marché (시장법)
국내 개봉 제목: 아버지의 초상
감독 : 스테판 브리제(Stephane Brize)
1. 복지국가의 실체적 균열
우리는 흔히 유럽, 특히 프랑스를 ‘복지국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복지가 곧 ‘공정함’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아버지의 초상》은 프랑스의 실업자 수당과 직업 재취업 과정이 어떻게 인간을 규정하고, 추락시키는지를 조용히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 티에리는 51세의 중년 남성이다. 오랫동안 중장비 기사로 일해왔지만, 어느 날 해고된다.
그는 실업 수당을 받으며, 국가가 요구하는 ‘재취업 프로그램’에 순응한다.
하지만 그 시스템은 이상하리만큼 비효율적이며, 사람을 자기 책임의 실패자로 몰아간다.
“기계가 고장났다고 사람이 고장난 건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고장난 기계는 버려지고, 티에리는 그 기계 취급을 당하고 있다.
2. 노동을 대체한 감시: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그는 대형 마트에 보안요원으로 취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노동은 노동이 아니다. 감시다.
그는 하루 종일 CCTV 화면을 들여다보며 누군가의 도둑질을 찾아내야 한다.
여기서 영화는 조용히 묻는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노동이 인간을 위엄 있게 만든다면, 감시는 어떤가.”
그리고 더 잔인한 질문이 이어진다.
“너는 동료를 팔아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 장면에서 티에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그는 화면 속에서 동료의 잘못을 보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 선택은 그를 해고로 이끈다.
그러나 관객은 안다. 그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마지막 자존이었다는 걸.
3. ‘가족 영화’라는 오해: 《아버지의 초상》은 윤리의 영화다
이 영화를 ‘가족 영화’로 볼 수도 있다.
물론, 티에리는 가족을 위해 산다.
장애를 가진 아들을 정성껏 돌보고, 아내와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한다.
하지만 영화의 핵심은 가족을 위해 어디까지 침묵하고, 어디서부터는 침묵을 거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딜레마다.
결국 그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지만, 가족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한다.
가난은 숨길 수 있어도, 양심은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4. 켄 로치와의 차이점: 분노 대신 품위로 말하기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국가를 향해 분노의 손가락질을 한다면,
《아버지의 초상》은 더 내면적으로, 더 조용하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라면 이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살겠는가?”
“그 침묵은 비겁함인가, 혹은 마지막 남은 인간다움인가?”
켄 로치가 외치고, 스테판브리제는 응시한다.
하지만 두 영화는 모두, 같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
이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갈수록 ‘선택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5. 윤리는 배고픔보다 약할까?
《아버지의 초상》은 묻는다.
“양심은 배고픔보다 강한가?”
“가난한 사람에게도 윤리를 요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영화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티에리라는 한 남자의 침묵 속에서
그 질문을 조용히 우리에게 넘긴다.
우리는 그 침묵을 보며 각자의 마음속에서 대답하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전부일지도 모른다.